다음 주제로 글을 작성해보자.
내가 현재 고치고 싶은 행동 중 하나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현재 내가 고치고 싶은 행동 중 한 가지는 폭식증이다. 다이어트를 위해서 16-8 간헐적 단식을 유지중인데, 8시간 안에 먹어야 한다는 생각때문에 평소보다 더 밀어넣는 경우가 종종 있다. 물론 매번 그러한 것은 아니고 오늘 점심과 같은 상황에서 특히 그러하다. 남편과 피자 두판을 주문해왔다. 그리고 반판인 4조각을 시누이와 아버님께 전달해드리고, 남은 한판에 반판을 남편과 함께 먹었다. 먹다가 배부르네 하는 순간이 4조각 먹었을 때 였다. (피자스쿨이라 조각도 얇고, 토핑이 적다는 변명을 대본다.) 일단 그래서 잠시 멈추었는데, 이게 너무 아깝다고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남편이 두판이나 주문할 줄 몰랐기 때문에 더 남기는 게 아깝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던 것 같다. 결국 남편과 영상을 보며 남은 4조각을 내가 다 먹었다. 그 중 한 조각은 첫째 아이가 절반 먹고 남은 절반을 내가 먹어서 정확하게는 7조각 반이고 테두리 부분은 둘째가 다 먹었으니 테두로 떼는 게 맞지만 말이다. 내가 고민하는 포인트는 이거다. 남편은 배가 부르면 앞에 그 어떤 산해진미가 있어도 젓가락을 내려놓는다. 그렇지만 나는 계속 먹게 된다. 이번 기회가 아니면 내가 이걸 못 경험할 것이라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드는 것이다. 언제든 경험할 수 있다. 혹은 남편처럼 다시 경험하지 못해도 괜찮다 라는 마음을 가지고 내 몸이 원하는 만큼만 섭취하고 싶은데 내 머리 속에서는 괜찮아, 이거 다 먹고 저녁을 일찍 먹든지 굶던지 하자! 이런 말이 울려퍼진다. 결국 나의 본능이 이기는 순간이 대다수이고 나는 패배감속에서 살게 되는 기분이 든다.
어쩌면 내가 살아온 과거의 패턴에서 기인하는 것도 있다는 생각이 글을 적다보니 들었다. 나는 눈치를 정말 심각하게 많이 본다. 물론 눈치를 안보고 살고 싶은 것이 나의 기본값인데, 그것 때문에 자꾸 문제가 생기니 후천적으로 눈치가 생겼다. 특히 나를 낳으면서 엄마가 겪었던 일련의 고통스럽고 힘들었던 과정들을 내가 자아가 생기기 전부터 귀에 딱지가 앉게 들어왔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가 엄마에게 상처를 준다는 게 안되는 일 처럼 느껴졌다. 물론 중간중간 너무 화가 나는 순간에는 화를 내기도 했지만, 결국 대부분은 내가 먼저 사과하고 엄마에게 잘못했다는 말을 했다. 그런 상황이 나의 일상에 자리하고 있다보면 나의 식생활도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게 된다. 나는 어릴 적에 입이 짧았다. 라면 하나는 당연히 못먹고 매운 음식 자체를 못먹었기 때문에 라면을 다 같이 끓여먹을 때 면만 건져서 정수기에서 물받아서 행궈서 먹었었다. 과자도 한 봉지 다 못먹었는데, 배가 부르다기 보다는 물려서 못먹었었다. 그런 나의 몸을 이해해주고 존중해주면 참 좋겠지만, 우리 집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세대가 자수성가하고, 그 뒤를 이어 우리 아버지도 자수성가한 집안이다보니 내가 누리고 있는 상당 부분이 나의 것이 아니고 블라블라의 가정교육을 받아왔다. 음식은 골고루 잘 먹어야 하고 어쩌구, 가부장적인 집안으로 항상 어른이 어쩌구, 예의가 어쩌구 등등의 내 친구들 세대의 아이들이 들어도 놀라는 경우가 종종 있는 그런 환경이다보니, 둘째인 나의 이야기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경우가 아주 많았다. 더불어 나의 위로는 햇수로는 2살이지만 개월로는 18개월밖에 차이나지 않는 거의 연년생급의 언니가 맏이로서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있었고, 나의 아래로는 7살 터울의 부모님의 바람을 가득 안고 태어난 남동생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받을 사랑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사랑을 받으려면 오로지 한 가지 뿐이었다. 눈치. 그것만이 나를 살려줄 유일한 도구였다. 그렇게 나는 셀프로 눈칫밥을 먹으며 내가 정말 견딜 수 없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부모님께 양보하며 살아갔다. 밥도 더 먹으라고 하면 진짜 너무 배부른 거 아니면 더 먹으려고 노력했고, 반찬도 먹기 싫지만 먹으라고 이야기하면 더 먹으려고 노력했다. 아직도 기억나는 일이 있다. 하루는 할머니 집에서 밥을 먹는데, 삼촌이었나, 엄마였나, 누가 노각무침 해달라고 해서 할머니가 정말 볼로 하나가득 무치셨는데, 노각이 씁쓰름한 아이로 잘못걸린거다. 열심히 무쳤는데 엄마도 삼촌도 할아버지도 모두 써서 안먹는다고 뭐라고 자꾸 그러니 할머니가 엄청 시무룩해하시는거다. 그래서 그 노각을 거의 내가 4분에 1은 먹은 것 같다. 할머니한테 나는 맛있다고 내가 많이 먹는다고 하면서 말이다. 우리 할머니는 쓰니까 먹지 말라구 그러다가도 내가 열심히 먹으면 무척 기뻐해주셨던 기억이 난다. 그 웃는 모습을 보면 내가 이 집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고 느껴졌었다. 나도 우리 가족에서 쓸모있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그게 내가 살아왔던 생존 방식이었다.
그렇게 나는 내가 왕따를 당하고 괴롭힘을 당해도 단순히 엄마 아빠가 슬퍼하실 것이다. 혹은 내가 혼날 것이다. 라는 두 가지의 반응 외에는 다른 반응을 생각할 수 없어서 꾹꾹 눌러 참았었다. 옥상가서 떨어져 죽을까 하고 올라갔는데 실패했었다. 한참 아이들이 떨어져 죽는 사고가 많았어서 옥상문이 잠겨있었다. 그 날 이후로 운명의 신이 개입한건지 그 문제가 오픈되고 여러가지 후폭풍이 지나간 후 안전하게 잘 정리가 되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살아가고 있겠지? 암튼 그 이후로도 여러가지 일들이 있지만, 결국 부모가 어떻게 아이에게 하느냐가 그 아이의 삶을 결정한다는 생각이 든다. 불가항력적인 나이에 여러가지 기억에 남을 만한 안좋은 일들을 경험하면 나처럼 자라나던 나무가 삐걱삐걱 꺾인 모양새가 되니까 말이다. 우리 아이들이 밝은 빛을 내며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면서도 그게 힘들어서 버거운 일이 아니라, 그걸 통해서 우리 아이들도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것을 바란다. 그러려면 내가 엄마로서의 역할을 잘 해내야 하는데 말이다. 어째 영 쉽지가 않다. 그럼에도 매일 나에게 깨달음이 오는 순간순간이 더 자주 오기를 바라며 그 순만에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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